가물치는 HID(북파공작원) 출신으로 영등포 일대에서 독종으로 악명높은 건달이었다. 그는 어려서부터 부모를 잃고 고아원에 맡겨진 채로 함께 자란 순자라는 피붙이 여동생이 하나 있었다. 순자는 낮에는 청계천에서 미싱을 밟으며 일했고 밤에는 고등공민학교에서 공부를 하며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을 키워가면서 야무지게 살았다. 그리고 고등학교 대학교 검정고시를 거쳐 숙명여대에서 의상디자인을 전공했다. 어느날부터 순자는 당시 권력의 중심에 우뚝 서있는 김○○ 국회의원 아들과 열애에 빠지게 되었는데 덜컥 임신을 하고 말았다.
하지만 꼭 결혼하겠다고 철썩같이 맹세했던 남자는 순자가 임신한 사실을 알고 어느날 갑자기 순자와의 연락을 무 자르듯 뚝 끊어버렸고 몇달 후 모 재벌기업가의 딸과 전격적으로 결혼해 버렸다. 격분한 가물치는 어금니가 부서져라 호시탐탐 복수의 기회만 엿보고 있었는데 그러던 어느날 조간신문에 주먹만한 활자로 김○○ 국회의원 아들이 두 손목이 잘린 채 피투성이가 되어 시청 앞 광장에 버려진 것을 거리청소원이 발견하여 경찰에 신고한 사건으로 세상이 발칵 뒤집혔었다.(이것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었다.)
형기를 마치고 가족이 있는 집으로 돌아온 가물치는 그만 방바닥에 털썩 퍼질러앉아 밤이 타도록 짐승처럼 울고 또 울었다.
“형님. 고맙습니다! 고맙습니다아!”
아끼고 사랑하던 부하가 불행하게 되어 감옥에 있는 동안 광혁이는 사채업으로 벌어들인 돈을 뚝 떼어 35평짜리 아파트를 가물치의 아내 명의로 마련해주었고 가물치의 아내가 자식들과 함께 자립해서 먹고 살 수 있도록 영등포시장 목 좋은 곳에 음식가게를 장만해주었다.
하지만 가물치가 출옥할 때까지 절대로 그 사실을 말하면 안된다는 약속을 단단히 받고 해준 일이었다. 그래서 면회를 갈 때마다 식구들 잘 있으니 아무 걱정 말라고만 했다. 그 음식점에 손님들이 끓어넘쳐서 가물치의 아내는 영등포시장 일대에서 여중호걸로 소문난 또순이 여사장이 되어있었다. 아들은 연세대학교 신학과를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가서 박사학위 절차를 밟고 있는 중이었고 딸은 대학졸업반이 되어 예쁘게 성숙해있었다. 그는 그 이후로 광혁이의 삶에 그림자처럼 붙어다니며 옛날보다 몇배나 더 충성을 다했다. 훗날 가물치는 위암말기에 처해 목숨이 경각에 달려있으면서도 병실의 침대에 누워있기를 거절하며 끝까지 고집을 부렸다.
“형님네집 대문 앞에다 데려다줘. 거기서 죽을거야.”
가물치는 소원대로 광혁이의 집 대문 앞에서 조용히 눈을 감았다. 가물치가 죽은 몇년 뒤 광혁이는 사채업을 정리하고 미국으로 이민 가서 LA의 어느 한인교회에서 수석장로로 일하면서 아프리카선교에 온몸을 던지던 중 2004년 7월 말라리아에 걸려 하늘나라로 갔다. 김가다는 지금 그 친구가 너무도 그리운 모양이었다. 사채를 빌려쓰고 기사회생한 기업도 수없이 많고 돈 때문에 좌절에 빠져 목숨을 끊어버리고 싶었던 사람들이 사채업자 덕분에 새로운 삶을 살아가는 경우도 수도 없이 많다고 김가다는 생각했다.
“비록 건달이긴 했지만 광혁이는 멋진 사채업자였지...”
시월 막사리이긴 하지만 피빛 단풍으로 빨갛게 물들어버린 소요산의 계곡, 작은 돌 위에 앉아 단풍잎새로 언뜻언뜻 내어다 보이는 쪽빛 하늘을 올려다 보며 조그맣게 탄식했다.
“에휴! 그나저나 참 딱덜두 하지. 아니 젊어서부터 머리털 죄 빠져가며 죽어라 공부해서 사법고시에 합격했으면 그래두 먹고살 정도는 되어야지. 그래 나같이 막가파식으로 살아온 장돌뱅이도 한달에 200만원은 더 번다. 아니 그래 판검사출신 변호사들이 한달에 200만원 밖에 못번다고 세무신고를 했다니 그 돈으로 어떻게 처자식들 먹여살리고 새끼덜 공부시켜 그래? 애그 댁덜두 참 딱허우 쯔쯔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