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계를 들여다 보았다. 동창회에 늦지 않으려면 아직도 시간이 꽤 남아있었다. 일찍 서둘러 집을 나섰던 탓에 그만큼 시간적 여유가 남았다는 것이 여간 다행스럽지 않았다.
김가다는 다시 집으로 향하는 버스에 올랐다. 부랴부랴 샤워를 끝내고 옷을 갈아입었다. 그런데 이번엔 덕정에서 의정부로 돌아가는 버스 속에서 또 여제자 하나를 만났다. 정화라는 여제자였다.
덕정사거리에서 버스가 섰다. 당시에는 덕정사거리에 군 검문 초소가 있어서 오가는 버스를 세워놓고 헌병들이 올라와서 사람들을 일일이 검문했었다. 김가다는 검문소에서 버스가 설 때마다 뭐 죄지은 일도 없으면서 공연히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다. 사실 이 검문소에서만 해도 벌써 꽤 여러번 불려 내렸었다.
그 검문소 층계를 한참 내려가면 사방이 콘크리트 벽으로 둘러싸인 비밀 아지트가 있었다. 옛날 서슬퍼런 군정시절에 그곳은 공포의 벙커였다. 검문 때마다 헌병들은 꼭 김가다를 찍었고 그 때마다 김가다는 주민등록증을 소지하지 않았던 이유로 그 지하벙커 속으로 끌려내려가곤 했었다. 아니나 다를까 헌병이 김가다 앞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어김없이 김가다에게 주민등록증을 요구했다.
“주민등록증이 없으면 내리셔야죠. 조사좀 해야하니까.”
“이 분은 제가 중학교 때 영어를 가르친 분이에요. 신원이 확실한 분이세요.”
하지만 돌처럼 딱딱한 헌병의 태도는 한결같았다. 별 수없이 김가다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할 수 없죠 뭐. 내립시다. 정화는 먼저 가라구.”
“아녜요 선생님, 같이 내려야죠. 제가 선생님 신원을 보증해야죠.”
헌병초소 안으로 불려 들어간 김가다를 선임하사인듯한 또다른 사복헌병이 몇 번씩이나 아래위를 훑어보며 따지듯 물었다.
“당신 한두번 걸린게 아니네. 여기 기록되어 있는것만 해도 네번이구 도봉검문소에선 경찰관 멱살을 쥐고 흔들었던 일도 있고...이것봐라. ○○연대 보안대장을 떡이 되도록 팬 적도 있구 엉? 우리부대 헌병대장도 죽어라 두들겨 팼었네?”
“팰만하니까 팼구 맞을만 하니깐 맞았겠지. 당신도 좀 맞아야겠네. 나 지금 20년만에 처음으로 동창회 나가는 걸 당신이 붙들어 놓고 있어서 산통 다 깨지게 됐어 지금!”
헌병대 선임하사는 더 이상 암말도 않고 거쿨지게 김가다를 내보내며 말했다.
“우리 헌병대랑 뭐 전생에 원수진 것 있수? 사이좋게 지냅시다 우리.”
다시 버스를 기다리는 기분이 여간 짠하지 않았다. 그 때였다.
“어맛! 이를 어째?”
“왜, 왜그래?”
“구, 굴통을 버스간에 그냥 놓구 내렸어요. 으앙, 엄마가 오늘 김장에 쓴다고 사오라고 해서 3만원이나 주고 샀는데 아이그 큰일났네 어쩜 좋아아!”
“구, 굴이라고 그랬어?”
“그렇다니까요 선생님. 아이그 큰일났네에!”
“......!!!”
그날 주머니를 톡톡 털어서 다시 굴을 사서 정화에게 들려보내고 김가다는 그예 동창회에 참석할 수 없었다. 어쨌거나 그날 이후로 김가다는 굴이라면 고개를 산지사방으로 흔들어 댔다. 그날 굴벼락 땜에 철저하게 날떠퀴가 사나웠던 나쁜 추억 때문인가. 그 이후로 김가다는 꼭 주민등록증을 소지하고 다녔다.
“애그, 댁두 참 딱허우. 아, 예나 지금이나 대한민국 국민이면 누구나 주민등록증을 꼭 소지하고 다녀야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거지 그래 쯔쯔쯔...”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