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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연3
  2011-10-04 12:03:28 입력

▲ 이창민/외과전문의
예기치 않은 사고로 인해 뱃속의 장기가 파열되어 서서히 죽음의 문턱에 다가가고 있는 외딴섬의 노인. 우여곡절 끝에 육지로의 후송이 결정되었지만 노인의 위급한 상태는 육지까지 가기에는 시간적 여유가 너무 없어 보였다.

후송이냐, 여기서의 수술 강행이냐. 우리의 외과의사는 다시 고민에 빠진다. 환자를 후송하지 않고 수술을 강행했다가 잘못될 경우 빗발치듯 쏟아지는 비난을 피하기 위해서는 관례대로 후송을 진행하는 것이 당연하다.

하지만 제대로 수술조차 받지 못하고 바다 위에서 사망할 가능성이 있어 보이는 지금의 상황에서는 되든 안되든 수술을 진행하는 것이 노인을 진정으로 위하는 길인 것 같기도 하다. 한치 앞을 내다보기가 불가능한 상황에서 우리의 소심한 외과의사는 자신을 위할 것인가 노인을 위할 것인가에 대한 고민을 한다.

이렇게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고민의 늪에 빠진 외과의사는 문득 자신의 흰색 가운 소맷자락을 누군가가 조심스럽게 당기는 것을 느낀다. 뒤를 돌아보니 그곳에는 머리가 희끗하고 역시나 햇빛에 그을려 검어진 순박하기 그지없는 얼굴의 할머니가 서 있는 것이었다. 왠지 모르게 침상에 누워 있는 노인을 닮은 그 할머니는 누가 봐도 노인의 부인임을 한 눈에 알 수 있었다.

그 할머니를 보게 된 우리의 외과의사는 일순간 머릿속이 복잡해졌다. 현재의 상황, 육지로의 후송의 필요성, 여기서의 수술 강행시 뒤따르는 감당하기 힘든 결과들, 사망에 대한 가능성 등등…. 의례적으로 보호자에게 설명해야 하는 말들이 외과의사의 머릿속에서 동시에 정신없이 날아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생각의 다발들을 나름 정리하여 보호자인 할머니에게 말하려는 찰나, 외과의사의 입은 일순간 굳어버리고야 말았다. 왜일까. 그렇다. 의사는 할머니의 눈을 본 것이다. 주름진 눈꺼풀 사이로 이제는 탄력을 잃어 다소 칙칙해 보이기까지 하는 할머니의 눈동자.

하지만 그 눈동자를 더욱 깊이 들여다보게 되니 거기에는 아무 것도 없는 순수의 바다가 펼쳐져 있었다. 좋은 것도 나쁜 것도 선과 악의 경계도 없는, 그저 아무런 조건 없이 고요한 순수의 바다. 그 광활하고도 고요한 순수의 바다를 그는 본 것이다.

우리의 외과의사는 지금까지 남의 눈을 그렇게 뚫어져라 바라본 적이 없었다. 그렇다. 이 순간 외과의사는 모든 인간들의 내면에 숨어있던 아무런 조건 없는 순수함의 정수를 보게 된 것이다. 불과 몇초의 시간이었지만 이 짧은 순간이 의사에게는 무한의 시간으로 다가왔다.

그리고 할머니의 입에서 나온 한 마디. “선생님을 믿습니다. 다 잘 될 겁니다.” 그 말의 진동이 공기를 타고 병원에 퍼지는 순간 할머니의 눈동자에는 그저 멍하게 서 있는 외과의사의 모습이 반사되어 비친다.

이후 의사는 더 고민할 이유가 없어졌다. 육지로의 후송은 의미가 없다는 것을 확신케 하는 직감이 용솟음쳤고, 수술실 여건이 많이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이곳에서의 수술은 성공적으로 끝날 수 있다는 자신감이 거센 파도처럼 주체할 수 없을 정도로 밀려와 가슴 벅차오르는 감정을 느꼈기 때문이다.

수술 전 거쳐야 하는 수술동의서 작성, 수술에 대한 설명, 수술 후 경과에 대한 설명 등등의 세속적인 절차들은 이 순간만큼은 모두 허섭스레기에 불과했다. 의사는 지체 없이 노인이 누워 있는 침대의 손잡이를 움켜쥐었다.

그 순간 주위에 있던 사람들이 거의 동시에, 마치 자석에 달라붙는 쇳조각처럼 침대 주위에 몰려들어 각자 침대를 붙잡기 시작했다. 그들은 서로 말이 없었지만 모두는 이제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그들은 그렇게 일심동체가 되어 힘차고 빠른 기세로 수술실로 침대를 몰고 돌진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바로 그때였다. 침대가 삐걱대는 소리를 내며 빠르게 수술실로 향할 즈음 일련의 사내들이 병원 문을 박차고 들어오며 또 다른 작은 기적은 일어났다.

(다음 회에 계속됩니다.)

2011-10-04 15:15:41 수정 경기북부시민신문(hotnews24@paran.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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