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김가다는 느닷없이 옛날 군대시절에 있었던 에피소드 한토막이 생각났다. 그때는 김가다가 세상을 거침없이 제멋대로 살았던 청년시절이었다. 지금처럼 하나님을 영접하고 비록 서리집사이긴 해도 명색이 교회의 집사가 되기 훨씬 옛날의 일이었으므로 가능했던 이야기다.
김가다가 최전방의 철책선 아래에 누에벌레처럼 엎드려 있는 막사에서 행정병으로 근무했을 때의 일이었는데 당시만해도 캄캄한 밤에 북파공작원이 검은 두건을 쓰고 김가다의 초소를 그림자처럼 통과했었고 북쪽에서 넘어온 간첩이 중대내무반에 수류탄을 까 넣는 바람에 중대원 전원이 몰살되기로 했었다. 야간에 외곽 보초를 섰던 병사가 특수훈련을 받은 간첩들에 의해 목이 잘린 채로 발견되기도 했던 곳이었다.
그 살벌하기 짝이 없는 막망궁산에 어느날 갑자기 여자가 나타났다. 그녀는 대대장 숙소에서 일하는 식모였다. 얼굴이 호박처럼 너벳벳하니 평수가 넓었고 뚱뚱했다. 바깥 세상에 내다 놓으면 아무도 거들떠보지 않을만큼 생긴 게 영 아니었지만 그래도 수많은 숫놈들 가운데 홀로 피어있는 호박꽃이었다.
“아! 저 여자랑 이야기라도 한번 해봤으면...”
하지만 그건 말도 안되는 그림의 떡이었다. 대체 무슨 수를 부려서 대대장 숙소에 있는 여자에게 접근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어느 날이었다. 추석이 지나자 병사들은 바로 ATT훈련을 나갔으므로 눈깜짝이 인사계와 환자 몇 명 그리고 김가다만 잔류병으로 남아 부대를 지키고 있었다.
대대장 숙소는 김가다의 내무반 바로 옆에 있었다. 참으로 희한한 일이었다. 비록 습습한 성격이긴 했지만 여자 앞에만 서면 얼굴이 빨개질만큼 빙충맞기 짝이 없었던 김가다가 그날 어쩌자고 대대장 숙소가 있는 마당으로 들어섰는지 모를 일이었다. 마침 그녀가 뒤꼍에 나와서 빨랫줄에다 빨래를 널고 있었다. 김가다가 그녀에게 다가가서 말을 걸었다.
“저...부탁좀 할려구요.”
“?”
“김치 좀 얻을 수 있을까요? 그 대신 추석 특식으로 나온 사과랑 통닭이 있는데.”
그녀가 아무 말도 없이 집안으로 들어가더니 김치를 한 사발 담아내어 왔다.
“사과랑 통닭 갖다드릴게요.”
“안돼요, 빨리 가세요.”
“예?”
“누가 보면 큰일나요. 주실려면 이따 밤에 갖다주세요.”
“그럴까요 그럼?”
그리고 그날 밤 김가다는 사과랑 통닭 한 마리를 싸들고 대대장 숙소로 향했다. 그리고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그녀가 낌새를 알고 살그머니 방문을 열어주었다.
“들어오세요. 제 방이에요.”
김가다가 그녀의 방으로 들어섰다. 그녀의 방에는 잘 정돈된 이불이 몇 채 윗목에 잘 접혀있었고 그 옆에 조그만 쪽소매 화장대가 한 개 댕그러니 놓여 있었다. 순간 김가다는 가슴에서 불덩이가 치솟는 느낌이었다. 그녀가 김가다 맞은 편에 앉아 생긋 웃으며 입을 열었다.
“김병장님 자주 봤어요.”
“예? 어, 어떻게요?”
“제방 창문으로 김병장님네 내무반이 훤히 내다보여요. 항상 취사장에서 제일 늦게 밥먹고 내려오던데요?”
“행정병이니까 항상 밥을 제일 늦게 먹어요.”
추야장 긴긴 밤이긴 해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길게 끌 필요가 없는 순간이라고 김가다는 마음 먹고 슬며시 그녀에게 바짝 다가 앉았다. 그녀가 조금도 거부 반응없이 김가다에게 몸을 내어 맡기고 있었다. 그 때였다. 창밖에서 낙엽 부서지는 소리에 두 사람이 하던 짓을 멈추고 귀를 쫑긋 세웠다.
분명 사람의 발자욱 소리가 분명했다. 순간 그녀가 으앙하며 울음을 터뜨리고 말았다. 모름지기 자기는 누군가에게 억울하게 당하고 있다는 뜻을 내비친 행동이었다. 깜짝 놀란 김가다가 군화를 신는둥 마는둥 내무반 쪽으로 죽어라 내 달았다. 추석 다음날이었으니 달빛이 또 얼마나 밝고 깨끗했겠는가.
그리고 부대에 소문이 쫙 깔렸다. 김가다가 대대장 숙소에 침투해 들어가 대대장 식모를 말아먹었다는 소문이었다. 그때 그 발자욱 소리는 분명 김가다가 대대장 숙소에 침투해 들어간 사실을 눈치챈 누군가의 발자욱 소리가 분명했다.
요즘 흔해빠진 TV 연속극에 단골메뉴처럼 등장하는 숨겨놓은 불륜의 자식이 느닷없이 나타나서 행복한 가정을 풍비박살내는 장면이 재현될뻔 했던 사건이었다. 지금도 생각해보면 그때 창밖에서 낙엽을 밟고 엿듣고 있었던 누군가의 발자욱 소리가 얼마나 감사한지 모른다.
“인사계의 발자욱이었을까...아니면 배탈이 나서 죽네사네 꾀병을 부리던 정일병일까...”
군에서 제대한 후에도 그와 비슷한 찬스가 김가다에게 여러번 생겼었다. 시쁘긴 했지만 참 용케도 일이 성사되기 직전에 어떤 계기가 되어 일을 성사시키지 못했다.
“참 너무도 감사한 일이지...어디서 숨겨놓은 자식이 불쑥 나타났다고 생각해봐. 우리 마누라 기절하지 진짜...”
그러면서 요즘 대권후보 진영에서 서로 입에 거품을 물고 지랄하고 있는 꼴들 보면 참 한심스럽기 짝이 없다는 느낌이다.
“하아니, 도곡동 땅이 아무개 땅이면 어떻고 또 만에 하나 그녀가 아무개 누구랑 사이에 아이가 있었다 치자, 이런 젠장헐! 그게 뭐 그리 대수냐 이 말이지. 아, 지금 똑똑하고 진실하면 될 일이지, 지금 정직하고 능력 있으면 될 일이지 지난 날 잘못이 뭐 그렇게 흠이 되느냐 이 말이다아! 그래 그렇게 꼬투리잡기 좋아하는 놈덜 중에 털어서 먼지 안나는 놈 있으면 어디 한번 국민 앞에 쌍판대기 내밀어봐라.
또 주민등록초본 훌쩍 까뵈면서 나는 이렇게 경력이 깨끗하다고 자랑하는 후보들도 있는데 참 느덜두 딱두허다. 그거 깨끗하다구 해서 대통령 자격 되는거여? 느덜 논리대로라면 나처럼 행팬없는 경력이 화려한 촌맹들은 절대로 목사도 못되고 장로 집사도 어림도 없겠네? 애그...그러구서두 백성을 위해서 어쩌구 저쩌구 입에 침이 마르도록 넋두리를 늘어놓는 꼴허군. 쯔쯔쯔...어쩌면 생각하는게 그리 죄다 참새 대가리야 그래?”
어쨌거나 김가다의 마누라는 김가다가 과거에 그런 좋지 못한 바람기도 있었는데다가 사람을 개패듯이 두들겨 패곤 했던 깡패경력까지도 일체 마음에 두지 않는 아내였다.
“아, 한강에 배 지나간 격이지 뭘. 지금 신앙생활 잘하고 착하고 진실하고 앞으로 더 잘하면 그만이지, 지나간 일이 무슨 문제에요?”
하여튼 많은 사람들이 입을 모아 여옥기인이라고 칭찬하기도 하지만 김가다는 마누라가 여간 고맙고 기특한 것이 아니었다.
“우리 마누라가 최고중에서두 최고지 진짜...하지만 아무리 지나간 일이긴 해도 그때 대대장 식모와 일이 잘 성사되었더라면 어쩔 뻔했어. 어느 날 갑자기 숨어있던 자식이 지금쯤 나타나서 ‘아부지요’하고 대든다면 그날 밤 내내 마누라에게 후라이팬으로 썩어지게 두들겨 맞는 일이야 불보듯 뻔하지 진짜 어휴! 어쨌거나 그날 밤 그 발자욱의 주인이 너무도 고맙다 진짜...”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