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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탈아론의 첫 희생양은 우리 조선이었다.”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라고 칭송받는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1만엔권의 주인공이다. 그는 근대 일본의 계몽사상가이며, 메이지 정부 대변자 역할을 자임했던 국권론자로 명성을 떨쳤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 하급 무사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가 태어난 시기는 에도 막부가 지배하던 시절이었다. 그는 실력이 있어도 출신성분 때문에 성공할 수 없었던 계급사회에서 태어난 것에 대해 많은 불만을 가졌었다.
하지만 근대화를 원하던 일본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능력을 필요로 했다. 그는 외국어에 남다른 재주가 있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자신의 능력을 십분 살려 에도에 네덜란드 어학교인 난학숙(蘭學塾)을 설립했다. 1860년 이후 막부의 견외사절로 유럽과 미국 등 해외를 여행하며 새로운 별천지인 서구문명에 눈을 뜨게 됐다. 한 마디로 인생역전의 기회를 잡은 것이다.
당시 일본은 미국을 비롯한 서구 열강의 개화압력에 굴복해 서구문명을 받아들이고 있었다. 전 근대적인 쇼군이 지배하던 막부체제는 막을 내렸고, 1868년이 되자 메이지유신을 단행해 일본 근대화는 본격화됐다. 그 배후에는 바로 후쿠자와 유키치가 있었다. 그는 학숙을 이전하면서 게이오기주쿠로 개칭했다. 이것이 현재의 게이오대학 기원이다. 또한 일본의 유력 언론사인 산케이신문을 설립한 언론인이기도 했다.
하지만 그는 메이지유신의 사상적 후견인이면서도 신정부의 부름을 사양하고 교육과 언론활동에만 전념했다. 특히 1873년 메이로쿠사(明六社)를 창설한 후로는 동인으로 활약하면서 실학을 장려했으며, 부국강병을 주장해 자본주의 발달의 사상적 근거를 마련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우리와 악연이 깊다. 그는 일본을 맹주로 하는 대동합방론(大東合邦論)을 꿈꾸었다. 하지만 조선이 문제였다. 임오군란 후 조선에는 청의 세력이 확대됐다. 그는 청을 막고자 조선의 급진개화파를 조종하기로 마음먹었다. 김옥균, 박영효, 서재필과 같은 인물들을 지원했지만 그들은 너무 어렸다. 얼치기로 갑신정변을 일으켰다가 오히려 청의 신속한 대응으로 실패했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탈아론을 발표했다. 즉, 일본이 지향하는 길은 아시아가 아니라 서구 열강이어야 한다는 생각이다. 물론 그 첫 번째 희생양은 조선이었다. 그는 조선정략론을 주장하며 조선의 일본 식민지화를 주장했다. 결국 그의 제자들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는데 성공했다. 우리 민족의 비극은 후쿠자와 유키치로부터 시작된 것이다.
후쿠자와 유키치는 일본인의 입장에선 일본 근대화의 아버지로 존경받지만, 우리에게는 탈아론을 주장해 일제 군국주의를 우상화하는 오늘날 아베 총리와 같은 일본 우익들의 뿌리이자 한일 현대사 왜곡의 근원이다.
얼마 안 있으면 광복절이다. 우리가 국권을 회복한 지 70년이 지났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개방의 롤 모델로 그를 제시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후쿠자와 유키치의 망령이 살아 있는 한 일본 제국주의도 죽지 않을 것이다. 망국의 역사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후쿠자와 유키치를 바로 알아야 한다. 역사의 교훈을 잊지 말아야 한다.
칼럼니스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