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나라의 8월이라 하면 대체로 광복을 연상한다. ‘빛[光]을 되찾음[復]’은 길이 기념할 만한 자랑스러운 일이다. 하지만 우리나라의 8월 사(史)가 이처럼 우리에게 영예로운 기억만을 선사하는 것은 아니다. 광복이 민족의 지상과제가 되게끔 한 국권 피탈의 중요한 순간이 8월에서 비롯되었기 때문이다. 1907년 8월1일에는 대한제국 군대해산이, 1910년 8월29일에는 경술국치라는 근현대사상 최대의 시련이 있었다. 이에 아래에서는 8월에 진행된 국권 피탈의 과정과 광복을 살펴봄으로써 8월 민족사의 영욕(榮辱)을 회고해 보고자 한다.
우선 언급할 8월 근대사의 시련은 대한제국 군대해산이다. 사실 이는 1907년 7월20일 고종 강제 퇴위와 동월 24일 한일신협약의 연장 선상에서 이루어진 대한제국 병탄의 결정적 조치였다. 협약에 부속된 밀약에 규정되어 있던 군대해산은 7월31일 (일제의 강압에 의한) 순종의 조칙과 8월1일 동대문 훈련원에서의 무장해제로 강행되었다.
이렇듯 군대해산에서 나타난 대한제국의 시한부 운명은 1910년 8월29일의 경술국치라는 또 다른 8월 근대사의 시련으로 비극적 결말을 맞았다. 기유년 대한제국의 마지막 실권인 사법권을 강탈한 일제는 1910년 8월22일 사내정의(寺內正毅)와 이완용의 이름으로 국권 피탈의 늑약을 강행했다. 한국인의 극렬한 반항을 염려한 일본은 모든 집회를 금지하고 원로대신을 연금한 뒤인 8월29일에야 순종에게 양국(讓國)의 조칙을 발표하게 했다. 이로써 대한제국 성립 14년·조선 건국 519년 만에 망국을 맞이하였고, 민족사 반만년래 최초로 국권을 피탈 당하는 치욕을 경험하게 되었다.
비록 우리 민족은 반만년래 최대의 시련을 맞이하였으되, 육사 시인이 애타게 기다렸던 ‘다시 천고의 뒤에 백마 타고 올 초인’에 대한 희망을 놓지는 않았다. 그래서 군대해산에 대하여는 구국운동으로서의 정미의병이, 경술국치에 대하여는 독립운동이 맹렬히 전개되었던 것이다. ‘내리는 눈’에 맞서 ‘가난한 노래의 씨’를 뿌린 순국선열과 애국지사의 원훈(元勳)으로, 경술년의 치욕은 36년 만에 광복이라는 영예로 바뀌어 8·15라는 이름으로 민족의 앞에 드리웠다. 3년 뒤의 같은 날에는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됨으로써 우리 민족은 겹경사를 맞이했다. 이로써 8월15일은 국경일로 지정되었고, 광복과 정부수립을 기념하는 국가 원수의 장엄한 수사가 매년 8월15일마다 울려 퍼지게 되었다.
이처럼 영욕이 교차했던 20세기의 8월은 우리에게 특별한 의미로 다가온다. 아픈 기억과 자랑스러운 기억이 맞물린다는 점 자체가 특별하지만, 아무래도 치욕 속에서 영예를 창조해낸 8·15에 좀 더 눈길이 간다. 물론 광복과 함께 우리는 분단을 맞이함으로써 민족사의 또 다른 과제를 떠안았지만, 8월 근대사의 시련을 극복하고 대한이라는 이 땅의 이름을 되찾아 준 독립유공자의 희생과 공헌의 숭고함만큼은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져야 한다. 또한 독립유공자들의 각고의 노력으로 ‘회복한 빛[光復]’을 다시는 ‘상실하지[國恥]’ 않도록 상기한 8월의 시련을 감계(鑑戒)로서 영원히 간직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