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암 백인걸 선생 탄생 520주년 기념 학술심포지움②
양주문화원이 ‘휴암(休菴) 백인걸(白仁傑) 선생 탄생 520주년’을 기념해 양주시와 수원백씨 문경공 휴암종중 후원으로 지난 9월1일 양주회암사지박물관에서 개최한 학술심포지움 강연을 정리한다. 학술심포지움에서는 ▲명종·선조조의 정국과 휴암의 역할 ▲휴암 백인걸의 소차류 정론산문 연구 ▲휴암 백인걸의 철학사상 등의 강연이 있었다.
%5B1%5D.jpg)
1. 머리말
우리 학계에서는 남아있는 자료가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그동안 여러 가지 관점에서 휴암 백인걸의 생애와 사상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어 왔다. 따라서 새로운 자료가 나타나지 않는 한 새로운 논의의 전개는 기대하기 어렵다고 생각한다. 필자는 기존의 연구 성과를 참고하면서, <휴암선생실기(休庵先生實記)> 권1에 수록된 ‘소계(䟽啓)’ 8편에 주목하여 휴암의 사상을 재음미해보고자 한다. 이 글에서는 ‘소계’를 학계의 관행을 따라 편의상 ‘소차류(䟽箚類) 정론산문(政論散文)’이라 부르기로 한다.
2. 휴암 정론산문의 경개와 내용적 특징
<휴암선생실기>에 수록된 소차류 정론산문 8편 가운데,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것은 거의 없다. 다시 말해서 시작(서두), 중간(본론), 끝(말미)의 문장 구성에서 중간 부분은 대체로 남아 있지만 시작이나 말미 부분이 온전하게 갖추어진 글은 1~2편에 불과하다. 아마도 원본이 제대로 후대에 전해지지 못한 탓으로 보인다.
(1) 독계(獨啓)를 통한 고충정기(孤忠正氣)의 표출: <헌납시론밀지계(獻納時論密旨啓)>
1545년(을사) 8월23일 사간원 헌납(정5품)으로 있을 때, 문정왕후의 밀지를 윤원형이 받아 부당하게 처리한 사태에 대해 간쟁한 계문이다. 우리 역사에서는 1545년(명종 즉위), 왕위 계승을 둘러싼 외척 간의 갈등에서 소윤이 대윤을 숙청하면서 10여명의 사림이 피화되어 사형이나 유배에 처해진 사건을 ‘을사사화’라고 한다.
국가의 대사는 반드시 공명정대하게 처리해야 후유증이 없게 된다는 신념을 지닌 그였다. 조정에서 정식 절차를 밟아 대사를 논의하고 구체적인 내용을 공표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문정왕후와 윤원형은 거꾸로 밀실정치의 유혹을 뿌리치지 못했으니, 그 후과로 장차 생겨나게 될 후유증이 걱정되었다. 그래서 문정왕후의 밀지를 따른 윤원형을 비롯하여 이러한 사태 발전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수수방관한 대사헌 민제인 등 언로선상에 있던 모든 이들의 죄상을 물어 처벌해야 한다고 홀로 주장했던 것이다.
동료들이 모두 자기 일신의 안위를 염려하여 선뜻 나서지 못하는 상황에서 독계(獨啓)를 결심한다는 것은 평소 부단한 내면수양을 통해 축적한 호연한 대장부의 기상이 없었다면 어려웠을 것이다. 우리는 그러한 ‘외로운 충성과 정직한 기운(孤忠正氣)’ 기상을 이 계문을 읽으면서 거듭 느끼게 된다.
(2) 국론(國論)과 사습(士習), 진유(眞儒)의 추장(追奬): <청정암조선생종사문묘차(請靜庵趙先生從祀文廟箚)>
휴암이 1568년(무진, 선조 원년) 2월 대사간에 임명된 후, 정암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하게 해달라는 청원을 담은 차자이다. 을사사화 뒤 끝에 선조의 등극으로 청명(淸明)한 정치가 요구되는 시점에 국론을 안정시키고 선비들의 기풍(氣風)을 바로잡아야 하는데, 이를 위해서는 진유(眞儒: 조광조)를 추장(追奬)하여 그에 대한 포숭(褒崇)-높은 관직과 아름다운 시호를 내리고, 문묘에 종사하는 일-을 지극히 하는 것이다.
이 차자에서 휴암은 자기의 스승이기 때문에 정암을 추숭해야 한다고 말하지 않았다. 보다 큰 시각으로 국시를 안정시키고 사습을 바로잡기 위한 최선의 상징적인 조치가 필요한데, 그것이 바로 정암의 문묘종사라고 했다.
(3) 정심(正心)과 학정(學政)의 일치(一致), 그리고 주경(主敬) 공부: <면성학차(勉聖學箚)>
1568년 새로 등극한 선조에게 성학(聖學)을 권면하는 차자이다. 휴암은 “성학을 도탑게 하여 정치의 근본을 세우라.(敦聖學, 以立治本)”고 하며 세 가지를 선조에게 요구했다.
하나는 군주의 한 마음은 조정의 근본이니, 군주의 마음이 바르게 유지되도록 힘쓸 것, 두 번째는 정사와 학문은 분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이니 학문에 힘쓰되 배운 것을 정사에 실천하도록 힘쓸 것, 세 번째는 밤낮으로 매사를 걱정하고 두려워하는 태도가 곧 경(敬)의 실체인데, 주경(主敬) 공부를 쉬지 말아서 성학을 완성하도록 힘쓸 것 등이 그것이다.
(4) 편국(便國)과 이민(利民)을 위한 직언(直言):<논시사겸청정암선생종사문묘소(論時事兼請靜庵先生從祀文廟䟽)>
이 소장은 1570년(경오) 선조가 가뭄이 심하게 들어 정국운영이 어려워지자 조신들에게 직언을 요구하는 교지를 내리자 이에 응답하여 올린 글이다. 율곡 이이의 문집에도 수록되어 있어, 율곡이 대신 지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대강 다섯 가지 실천사항을 제시하고 있는데, 선조는 휴암의 건의를 대부분 수용하였다. 그리하여 을사년과 기유년에 적몰한 재산을 환급해 주고, 죄적에 올라 있는 어진 선비들을 신원(伸冤)하여 서용(敍用)하였다고 한다.
(5) 문묘종사(文廟從祀)와 정암학(靜菴學)의 공헌(貢獻):<청정암선생종사문묘소(請靜庵先生從祀文廟䟽)>
1576년(병자) 경기도 관찰사 윤근수(尹根壽)가 휴암의 가난한 실정을 알고 이를 선조에게 보고하였다. 그러자 선조는 특명으로 쌀과 콩을 두 차례나 하사했다. 휴암은 이를 받아 임금의 하사품이라 하면서 고향의 친구들에게 나누어 준 바 있다. 그리고서 휴암은 선조의 은혜에 감사하는 상소문을 올렸다. 글에서 휴암은 정암의 문묘종사를 요청했다.
(6) 정암(靜菴)의 문묘종사(文廟從祀)와 서원사액(書院賜額):<사우참찬소(辭右參贊䟽)>
1578년(무인) 8월 선조는 특별히 벼슬을 자헌대부(資憲大夫) 의정부 우참찬으로 올리고 휴암을 불렀다. 그 때 휴암은 소장을 올려 사양의 뜻을 표했다. 주 내용은 정암 조광조를 문묘에 종사하고 도봉서원(정암 조광조 서원)에 사액을 내려달라는 것이다.
(7) 동서(東西)의 조화(調和)와 진정(鎭定), 정암(靜菴)의 사적(事績)과 공적(功績):<인구언진시폐겸진시무소(因求言陳時弊兼陳時務䟽)>
1579년(기묘) 5월 가뭄이 들어 선조가 조신들에게 직언을 구했을 때 올린 상소이다. 현재 남아 전하는 8편의 소차류 산문 가운데, 내용이 충실하고 편폭도 가장 긴 상소문이 아닌가 한다. 길이가 모두 수천자에 달하였으며, 선조가 읽고 나서 예우하는 비답을 내리고 승정원으로 하여금 한 본을 베껴서 대전 안으로 들이게 했다고 한다.
현재 남아 전하는 상소 요약본의 주된 내용은 크게 보아 두 가지이다. 하나는 동인과 서인의 조화와 당쟁의 진정이고, 다른 하나는 정암의 학문 사적과 후대에 끼친 공적이다.
(8) 소장(䟽章)의 대리윤색(代理潤色)은 무죄(無罪):<인율곡피핵자명소략(因栗谷被劾自明疏略)>
이 상소문은 앞서 1579년 올린 상소문에 대해 율곡이 대리로 소장을 썼다고 탄핵을 받자 선조와 동인들의 오해를 불식시키기 위해 쓴 글이다. 휴암은 솔직담백한 성격 그대로 숨김 없이 자기가 작문능력이 율곡보다 못하므로 그에게 자신의 생각을 알려주어 글을 윤색하게 했다고 고백했다. 선조의 분명한 입장표명이 있은 뒤에는 더 이상 대필문제가 쟁론의 대상이 되지 못했던 것 같다.
3. 맺음말
필자는 휴암의 소차류 정론산문이 보여준 문체 혹은 말하기 방식이 그의 품성에서 유래했다고 생각한다. 그의 좀처럼 꺾이거나 줄어들지 않는 줄기찬 직언의 정신은 고매하고 소광(疏曠)한 품성에서 유래한 것이다. 특히 소광한 품성이나 기질은 심한 경우, 예의나 규범에 구애받지 않고 제 마음대로 자유분방하게 행동한다는 것을 의미하는데, 휴암의 정론산문이 보여준 거침없는 필치와 부합되는 면이 있다.
우계 성혼은 기묘사화가 일어나지 않았다면 정암의 훈도 아래 휴암이 학문적으로 대성했을 것이고 또한 중간에 유배당하지 않아 많은 시간을 백성에게 봉사할 수 있었다면 그 위대한 공적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우계가 말한 기묘사화와 유배는 필시 휴암에게 불우로 작용하지만 필자는 그가 전개한 빛나는 언론활동이야말로 그의 불우를 무색하게 만들어 줄 수 있을 만큼 가치 있다고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