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사편찬위원회 관계자분께 거듭 부탁 드립니다.
국사편찬위원회 관계자분께 거듭 부탁 드립니다.
답변 좀 주시기 바랍니다.
저의 증조부님 鄭 容善에 대하여 좀 더 자세히 살펴보아 주시셨으면 하는 바램에서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시대적으로 볼때 1883년생(명치16년생)으로 항일운동 시대로 추정되며 구속 체포 시기는 1915~1928년 사이로 추정됩니다. 경성형무소 복역은 장기일 가능성이 높으며 다른 단체와 연계 가능성도 있다고 보여 집니다. 이번에 kbs1 시청자칼럼에 출연하게 되면서 경북 봉화군 척곡면 척곡리 척곡교회가 독립군 군자금모금에 관여되었다는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며 증언이 나오고 있답니다. 그리고 저의 증조부님께서 서벽전투나 인근 독립군과 일본경찰과 충돌시에 참여했다고 합니다. 그 인근 전투나 독립군에 대하여 살펴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그리고 현재 척곡교회가 금년 100주년이 되어 지방문화재로 지정받았답니다. 해발 350m에 위치한 첩첩산골 교회입니다. 이런 곳에서 은밀하게 독립운동이 일어났다는 사실입니다. 한번 살펴보셨으면 합니다. 다시한번 당부드리고 싶습니다. 저의 인연은 국가편찬위원회 김.광 선생님이 잘알고 계십니다.
그이유로는 지역권역이 경북 봉화로 대구지방법원이 안동지원 관할인데 경성 형무소로 압송된 것에 대해서는 다음 연계 가능성을 집어 볼 필요성이 있다고 보며 충청북도 청주군 양성면 도원리 3통에 살았다고 된 것에 대해서는 그곳과 연관이 있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당시에 그곳에서 무슨 운동이 있었는지 여부에 대해서도 관심을 가져 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당시 일제강점기에 만든 경상북도 경찰국에서 발간한 "고등경찰요사"에 저의 증조부님이 있는지 여부에 대해서 살펴 달라는 당부를 드리고 싶습니다.
당시 경성형무소에서 1928년5월20일 오후 3시20분에 병사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그런 경우에 시신이나 인수절차 등 아무것도 유족에게 인계한 것이 없는 만큼 다른 흔적들이나 기록이 남아 있을 개연성이 높은 만큼 이런 부분에도 각별한 관심을 기울려 주시기 바랍니다.
다른 방향으로는 경상도를 중심으로 일어난 각종 농민운동이나 다른 단체와 연관 가능성도 있는 만큼 "사상휘보"등에서도 살펴 주셨으면 하는 바램입니다.
사망기록: 제정호적에 소화3년5월20일 오후3시20분 경성형무소 감방(서기1928년5월20일오후 3시20분 사망) 형무소에서 통지하여 호적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증조부(정용선 鄭 容善)의 호적 주소는
성명: 정용선 (다른 이름으로는 재열在烈, 차용且容이라고도 불리어 졌다고 합니다.
출생년월일: 서기1883년12월17일생(명치16년12월17일생)
본 적 지: 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391번지
거주지: 대정3년 충청북도 청주군 양성면 도원리3통1호
대정4년 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7통10호
경북 봉화군 법전면 법전리 1062번지
전국을 무대로 독립운동(독립자금 군자금)을 담당 하였다고 함
저는 증손자인 만큼 들어 온 집안 이야기나 함께 살아온 동네의 주민들로 부터 전해들은 것이 전부이며 시대적 상황으로 증손자와 증조부와는 너무나 많은 시간차와 시대의 흐름이 있다는 사실을 이해하여 주시기 바랍니다.
지난 30년간 증손자로서 도리와 소임을 다하기 위하여 동분서주 하며 각고의 노력을 기울려 왔지만 경북 봉화에서 살며 운동을 하시던 증조부님이 성울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만 발견하고 여러가지 가능성과 개연성만 가지고 있는 수준에서 찾는 것은 매우 어려운 현실임을 느끼고 있습니다. 이제는 전문 인력이나 연구단체에서 관심을 가져 주셔야 찾아 명예회복을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참으로 민족의 암흑에 조국의 광복과 민족의 자주독립을 위하여 개인 보다 대의를 위한 나라 찾기 운동에 나선 증조부님의 높으신 애국정신을 이어 받아 부끄럽지 않은 후손으로 살기 위해 노력하고 있습니다.
반드시 자손 된 도리를 다할 수 있게 국사편찬위원회 교수님 그리고 연구위원님 여러분께서 증손자의 마음을 헤아려 주시기를 거급 당부 드립니다.
서울에서 정용선 의 증손자 정 병기
당부- 국사편찬위원회에서는 저의 증조부 같은 경우 "경성형무소 사망기록"이 확실하거나 호적에 기록된 형무소장의 계출문등에 대해서는 어떠한 견해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합니다.
< 증손자 증조부 독립운동 밝히려 30년 `고군분투' >
오는 8월14일 오후 6시55분 kbs1 시청자칼럼,우리들세상 프로에 직접 출연합니다. 많은 관심 가져 주시길 바랍니다.서울과 경북 봉화 춘양면사무소에서 촬영했답니다.
증손자의 도리는 돈버는 일에 앞서 우선, 조상님의 업적과 공훈 찾아 자손된 도리가 더 우선이라는 생각으로 지난 30년간 외길 인생 걸어 이제는 마무리 지어야 할 때라고 생각한다. 일제 강점기 서슬퍼런 일제에 항거하며 독립위한 항일정신과 독립정신은 반드시 본 받아야 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만든 제정호적 원부 모습-사망기록 상세히 기록>
"군자금 모금하다 경성형무소에서 옥사"
보훈처 "객관적 증명자료 없어 서훈 불가"
(서울=연합뉴스) 조성미 기자 = "일제시대 형무소 수형인 기록을 모두 불살라버렸던 정부가 이제 와서 독립운동으로 수감됐다는 걸 증명할 문서를 가져와야 독립유공자로 인정해준다고 합니다"
정병기(51)씨는 일제시대 경성형무소(현 서대무형무소)에서 옥사한 증조부가 독립투사였다는 사실을 밝히기 위해 30년 가까이 고군분투하고 있다.
그는 일가친척과 이웃의 증언을 토대로 "증조부 정용선(1883년생) 선생이 1900년대 초부터 1916년께까지 고향인 경북 봉화군을 중심으로 독립군 군자금 모금 활동을 했다"고 주장한다.
정씨에 따르면 독립 자금을 모으기 위해 친일파의 집을 털고 일본 주재소를 습격하는 등 위험천만한 활동을 서슴지 않았다는 그의 증조부는 1916년 갑자기 자취를 감추었고 10년 가까이 지난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통지서 한통만이 날아왔다.
정씨는 "당시 반일 활동가를 가두던 경성형무소에서 장기복역하다 숨졌다는 것 자체가 증조부가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희생됐다는 증거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그는 수형 사실뿐 아니라 다른 정황도 증조부의 항일 행적을 입증한다고 말한다.
증조부로 인해 일제로부터 모진 탄압을 받자 이를 견디지 못한 일가친척들이 그의 이름을 족보에서 `파내버린' 사실과 그가 실종된 이후 일제의 화가 미칠까 두려워한 가족들이 나서서 증조모를 개가시킨 사연 등에 비춰 증조부가 독립운동을 한 게 틀림없다는 것.
증조모는 독립투사의 아내였던 것을 감추기 위해 본명인 `박열이'에서 `정열이'로 개명까지 하고 개가했다는 게 정씨의 전언이다.
그러나 일제가 만든 호적에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사망했다고 기록된 것을 제외하면 그가 독립운동에 가담했다는 것을 증명할만한 서류는 남아있지 않다.
정씨는 고향 마을을 뒤져 증조부가 생존했을 당시 소년이었다는 90대 노인의 증언을 녹취하는 등 증조부의 항일 흔적을 찾으려 백방으로 노력했지만 판결문 등 구체적 증빙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독립유공 서훈을 끝내 받지 못했다.
그는 "정부가 요구하는 서류를 찾아 고향인 봉화군에 증조부의 수형기록을 요청했지만 돌아온 것은 `형의실효 등에 관한 법률에 의해 기록을 소각했다'는 어이없는 답변이었다"며 "서류를 태운 정부가 서류를 요구하는 꼴이다"고 비판했다.
그는 국내에서 안되면 외국에서라도 찾아보자는 생각에 1993년 미국 의회도서관에 편지를 띄워 수형인 명부가 담겨 있을지도 모르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200달러를 지불하고 사오기도 하고 일본 외무성에도 수차례 서신을 띄우기도 했지만 안타깝게도 결정적인 사료를 찾는 데는 실패했다.
정병기씨는 "독립운동가의 자료를 제대로 보존하지 못한 것은 정부의 귀책 사유인데 자손들에게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 집안이 가난해 문맹으로 살아야했던 나의 할아버지, 아버지처럼 대부분의 독립투사 후손이 무지하다는 것을 정부가 악용하는 것이 아니냐"고 비판했다.
경찰관으로 근무하던 1980년 강력범을 현장에서 검거하다 중상을 입고 국가유공자인 상이군경회원이 됐다는 정씨는 "서훈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할아버지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을 멈출 수가 없다. 개인으로서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했으니 국가를 상대로 행정소송을 낼 것을 검토 중이다"고 밝혔다.
정씨 주장에 대해 국가보훈처 관계자는 "객관적인 자료가 검증이 돼야 서훈을 추서할 수 있다. 정부에서도 정씨 증조부에 대한 자료를 찾고 있으나 좀처럼 성과를 거캵지 못하고 있다"고 말하며 이제는 뒤늦었지만 정부가 나서 미발굴독립유공자에 명예를 찾아 주는데 정부가 앞장서야 될것이라고 말했다.
본적은 경북 봉화군 춘양면 도심리 391번지
거소 및 주소지/ 경북 봉화군 법전면 풍정리 7통10호
경상도를 중심으로 군자금 운동으로 독립운동을 하였으며 척곡리 척곡교회가 아지트 역할을 하였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지고 있으며 운동 중 체포되어 서울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하였답니다.
helloplum@yn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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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증조부는 당당한 독립군이었소"
매년 광복절 때면 독립운동의 발자취와 가슴 아픈 식민 통치의 기억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지만 정작 그런 영광과 상처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인정을 못 받고 있는 사람들도 있다.
이들의 영광을 기억하고 상처를 치유해 줘야 할 정부가 팔짱 끼고 있는 사이, 정부 대신 과거의 흔적을 찾아 나선 후손들이 있다.
정용선의 증손자를 만났다.
■ 증조부 행적 찾아나선 정병기씨 = 14일 정병기 씨(49)는 100년 전 증조부의 행적을 찾기 위해 충남 청원군으로 갈 채비를 했다.
증조부의 독립운동 사실을 입증하기 위해 전국 각지를 돌아다닌 지 벌써 30년째다.
증조부가 활동했다고 알려진 경북 봉화군 모든 면사무소의 기록물 보관소는 이미 수차례 이 잡듯 뒤졌다.
정씨에 따르면 증조부 정용선 선생(1883년생)은 봉화군 일대에서 독립군 군 자금을 모으는 독립활동을 벌이다 1928년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
정씨는 전국 각지를 돌며 증조부가 경성형무소에서 옥사했다는 기록이 담긴 호적과 당시 봉화군 일대에서 의병활동을 벌인 독립군 명단을 입수했고, 증조부가 생존 당시 소년이었다는 90대 노인의 증언을 녹취하고 친필 증명도 받았다.
하지만 구체적인 죄목이 담긴 수형 자료가 없다는 이유로 보훈 당국은 국가 유공자로 인정할 수 없다고 통보해 왔다.
정씨는 1989년부터 수형 기록 등을 찾기 위해 법무부, 경찰청, 국사편찬위원회 등을 비롯한 국내 유관 기관에 민원을 제기했다.
그럴 때마다 "해당 자료를 보관하지 않으니 다른 부처에 알아보라"는 답신이 전부였다.
그러던중 정씨는 봉화군청으로부터 `수형인 명부는 형의 실효 등에 관한 법률(1980년 12월 18일 제정, 1984년 7월 30일 개정)에 근거해 폐기(소각)됐다`는 회답을 받았다.
그는 이에 대해 "일제강점기 옥살이를 한 독립운동가들의 기록이 담긴 자료를 어떻게 국가에서 소각할 수 있는가"라며 울분을 토했다.
국내 기관에 자료가 없다고 판단한 정씨는 일본 법무성과 미국 국무부 문서보존소의 문을 두드린다.
5년 여 동안 노력한 끝에 정씨는 미국 의회도서관에서 손수 수형인 명부가 들어 있는 마이크로필름 500장을 입수하기도 했다.
결국 지난 7월 말 정씨는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에 증조부의 독립활동을 인정받기 위한 민원을 넣었다.
이번에는 인정받을 수 있을까. 정씨는 "내가 이 일에 매달리는 것은 어떤 이익을 바라서가 아니다"며 "정부가 할 일을 제대로 안 하니까 나라도 나서야 되는 것 아니냐"고 반문했다.
[매일경제신문/박승철 기자 / 김대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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